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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멘델스존의 생애와 작품 - 바흐 르네상스를 이끈 낭만주의 작곡가

[작곡가 시리즈]

모차르트의 마지막 시기는 재정 불안과 병으로 흔들렸고, 베토벤은 청력을 잃는 가혹한 운명과 싸워야 했습니다. 클래식 작곡가 다수의 생애가 결핍과 싸움의 기록으로 기억되는 것과 달리,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은 당대 음악가로서는 드물 만큼 풍족한 교육 환경에서 출발했습니다. 함부르크의 부유한 은행가 가문에서 태어나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그 풍요를 나태가 아니라 바흐의 음악을 다시 무대에 올리고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세우는 구체적인 성취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흥미로운 지점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생전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은 작곡가 중 한 명이었던 그의 이름은 사후 약 90년이 지난 1936년, 나치 정권에 의해 라이프치히의 동상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유대계 혈통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풍요와 단절, 그리고 다시 찾아온 재평가의 궤적을 따라 멘델스존의 생애와 작품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초상화
제임스 워런 차일드가 그린 펠릭스 멘델스존의 초상, 1839년경
인물 한눈에 보기
• 한 줄 정의: 1829년 〈마태수난곡〉 재공연으로 바흐 르네상스의 결정적 전환점을 만들고, 작곡·지휘·교육에 제도적 유산을 남긴 독일 작곡가
• 생몰: 1809년 2월 3일 함부르크 ~ 1847년 11월 4일 라이프치히
• 국적·활동지: 독일, 베를린에서 성장하고 라이프치히에서 주로 활동
• 활동 분야: 초기 낭만주의 작곡가·지휘자·라이프치히 음악원 설립자
• 대표작 3개: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한여름 밤의 꿈〉 서곡과 극음악, 교향곡 4번 ‘이탈리아’

오늘의 진입점
• 처음 접한다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1악장 — 한 마디 반의 짧은 관현악 반주 뒤 독주 바이올린이 곧바로 노래를 시작하는 작품
• 들을 곳: Spotify · Apple Music · YouTube

1. 모든 것을 가졌던 신동의 형성기

멘델스존은 함부르크의 유대계 은행가 가문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자랐습니다. 집안에는 당대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드나들었고,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자녀들의 음악을 실제로 연주할 수 있도록 가정 연주회를 열고 전문 연주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이런 환경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어린 작곡가가 자신이 쓴 작품을 곧바로 듣고 고쳐 쓸 수 있는 살아 있는 실험실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운 속도로 나타났습니다. 멘델스존은 아홉 살에 피아노 공개 무대에 섰고, 10대 초반까지 여러 편의 현악 교향곡과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특히 열여섯 살에 완성한 현악 팔중주 Op.20과 열일곱 살에 쓴 〈한여름 밤의 꿈〉 서곡 Op.21은 그가 이미 10대에 작곡가로서 독자적인 어법과 놀라운 균형 감각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한여름 밤의 꿈〉의 유명한 ‘결혼행진곡’은 이 초기 서곡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멘델스존은 서곡을 쓴 지 약 16년 뒤인 1842년,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위한 극음악 Op.61을 추가로 작곡했고 그 안에 ‘결혼행진곡’을 넣었습니다. 10대의 환상적인 숲과 성숙기의 극음악이 한 작품군 안에서 다시 만난 셈입니다.

2. 생애의 전환점 — 바흐를 깨우다, 협주곡에 도전하다

멘델스존의 가장 큰 음악사적 공헌 중 하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다시 공개 무대에 올린 일입니다. 바흐의 음악 전체가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건반곡과 일부 성악곡은 연주와 교육을 통해 이어졌고, 베를린 싱아카데미에서도 바흐의 작품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태수난곡〉처럼 대규모 연주 인원이 필요한 작품은 바흐 사후 공개 공연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였습니다.

1829년 3월 11일, 스무 살의 멘델스존은 베를린 싱아카데미에서 자신이 축약하고 편집한 〈마태수난곡〉을 지휘했습니다. 공연은 큰 관심을 끌어 3월 21일 다시 열렸고, 4월 17일에는 멘델스존의 스승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가 세 번째 공연을 지휘했습니다. 이 무대는 이미 자라나던 바흐에 대한 관심을 공연장과 대중으로 넓히며 이른바 ‘바흐 르네상스’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829년 무렵 멘델스존의 마태수난곡 공연에 사용된 손글씨 합창 악보
1829년 무렵 〈마태수난곡〉 공연에 사용된 합창 파트 필사본. 
정육점 포장지 속 〈마태수난곡〉은 사실일까

“하인이 정육점에서 고기를 싸 온 종이가 알고 보니 〈마태수난곡〉 악보였다”는 이야기가 통설처럼 퍼져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사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1823년 또는 1824년 외할머니 벨라 잘로몬이 10대의 멘델스존에게 〈마태수난곡〉 필사본을 선물했다는 점입니다. 젤터가 가진 사본을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트 리츠가 베끼도록 했다는 경로가 전해지지만, 필사본의 정확한 제작 과정은 자료마다 세부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우연히 포장지 속에서 발견한 악보가 아니라, 음악을 사랑한 가족이 의도적으로 마련한 선물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또 하나의 결정적 전환점은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입니다. 멘델스존은 1838년 7월 30일 평생의 친구이자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이던 페르디난트 다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e단조 협주곡의 구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실제 완성까지는 약 6년이 더 필요했습니다.

협주곡은 1844년 9월 완성됐고, 1845년 3월 13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됐습니다. 멘델스존은 건강 문제로 지휘를 맡지 못했고, 작곡가 닐스 가데가 대신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독주는 곡의 구상 단계부터 조언을 나눈 페르디난트 다비트가 맡았습니다.

이 곡은 시작부터 당시의 관습을 비껴갑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시대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주요 주제를 충분히 제시한 뒤 독주 악기가 등장하는 구성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멘델스존의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짧은 반주가 한 마디 반 진행된 뒤 독주 바이올린이 곧바로 애절한 1주제를 노래합니다. 청중을 서론 없이 곡의 감정 한가운데로 끌어들이는 이 도입은 후대 낭만주의 협주곡의 설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3. 스타일의 진화 — 초기·중기·후기

멘델스존의 양식은 어느 날 갑자기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고전주의의 균형을 버리지 않은 채, 여행의 기억과 낭만주의의 색채를 그 안으로 조금씩 끌어들였습니다. 세 시기로 나누어 보면 그 변화가 더욱 또렷해집니다.

초기에는 바흐·모차르트·베토벤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어법을 빠르게 완성했습니다. 현악 팔중주 Op.20과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은 복잡한 성부를 투명하게 정리하는 능력, 짧은 동기만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솜씨가 이미 10대에 완성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

중기에는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교향악으로 옮기는 작업과 제도적 활동이 겹칩니다. 스코틀랜드 여행에서 출발한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 Op.56, 이탈리아 여행의 빛과 움직임을 담은 교향곡 4번 ‘이탈리아’ Op.90이 이 시기를 대표합니다. 동시에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지휘자로 연주 수준을 끌어올리고, 1843년 음악원을 세우며 음악가를 길러내는 제도까지 만들었습니다.

후기에는 협주곡과 실내악에서 더 응축된 표현을 추구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형식의 연결과 선율의 집중력이 정점에 오른 작품입니다. 누나 파니의 죽음 직후 쓴 현악 4중주 6번 Op.80은 이전의 우아하고 밝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격정과 어둠을 드러냅니다.

시기 특징 대표작
초기 바흐·모차르트·베토벤의 흡수, 이른 완성도 현악 팔중주 Op.20, 〈한여름 밤의 꿈〉 서곡 Op.21
중기 여행의 인상을 담은 교향악, 제도적 활동 병행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 교향곡 4번 ‘이탈리아’
후기 응축된 협주곡 어법, 파니 사후의 어두운 색채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현악 4중주 6번 Op.80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독주 바이올린 선율의 현대 조판 악보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1악장 독주 바이올린 선율의 현대 조판 악보

4. 동시대인과 맺은 관계망 — 파니, 다비트, 슈만

멘델스존의 음악적 동반자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친누나 파니 멘델스존(Fanny Mendelssohn, 1805~1847, 결혼 후 파니 헨젤)이었습니다. 파니는 동생과 같은 교육을 받았고 작곡과 피아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브라함은 음악이 펠릭스에게는 직업이 될 수 있지만 파니에게는 장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편지로 분명히 했습니다.

그 결과 파니가 쓴 가곡 여섯 곡은 펠릭스의 가곡집 Op.8과 Op.9에 동생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재능 있는 누나와 유명한 남동생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파니는 펠릭스가 새 작품을 가장 먼저 들려주고 판단을 구하던 작곡가였고, 펠릭스 역시 파니의 음악적 견해를 깊이 신뢰했습니다.

모리츠 다니엘 오펜하임이 1842년에 그린 파니 멘델스존 헨젤의 초상
모리츠 다니엘 오펜하임, 〈파니 헨젤의 초상〉, 1842년. 

훗날 빅토리아 여왕이 펠릭스를 만난 자리에서 그의 가곡 중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이탈리아(Italien)〉를 꼽자, 펠릭스가 그 곡의 실제 작곡자는 누나 파니라고 밝혔다고 전해집니다. 파니는 1846년,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본격적으로 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함께 만들어간 페르디난트 다비트는 연주 기법과 독주 파트에 현실적인 조언을 건넨 동료였습니다. 초연 지휘를 대신 맡은 닐스 가데와의 관계에서도 멘델스존의 신뢰가 드러납니다.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을 게반트하우스 무대에 적극적으로 올린 일 역시, 멘델스존이 자신의 작품만 지휘한 스타 작곡가가 아니라 동시대 음악을 움직인 음악가였음을 보여줍니다.

5. 생전의 인기와 사후의 굴곡

멘델스존은 생전에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습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이자 음악원 설립자로서 그의 위치는 단단했고, 영국에서는 여러 차례 연주와 지휘를 맡으며 빅토리아 여왕 부부와도 교류했습니다. 오늘날의 이미지와 달리 그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고독한 작곡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후의 명성은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1892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세워진 멘델스존 기념비는 1936년 11월 9일, 유대계 혈통을 문제 삼은 나치 정권에 의해 철거됐습니다. 원래 기념비는 이후 사라졌으며, 같은 시기 그의 음악도 독일 공연장에서 배제되거나 다른 작곡가의 작품으로 대체됐습니다.

1900년 무렵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세워져 있던 멘델스존 기념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의 옛 멘델스존 기념비, 1900년 자료. 이 기념비는 1936년 나치 정권 아래 철거됐다. 

2008년에는 사라진 옛 기념비를 바탕으로 새로 제작한 동상이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 인근에 세워졌습니다. 이는 원래 동상을 수리해 되돌린 복원이 아니라, 제거된 기념비를 역사적으로 되살린 재건이었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일부 음악사 서술에서 멘델스존이 베토벤이나 슈만에 비해 낮게 다뤄진 데에는 나치 시대의 정치적 단절이 남긴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가 저하의 원인을 반유대주의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형식의 균형과 우아함을 중시한 그의 음악이 격렬한 혁신과 내면의 고통을 높이 평가하던 20세기 미학과 맞지 않았던 점도 함께 작용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 멘델스존의 작품은 음반과 공연 양면에서 다시 폭넓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파니 멘델스존 역시 ‘펠릭스의 누나’가 아니라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가진 작곡가로 복원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명성만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서 가려졌던 음악까지 함께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6. 주요 작품 한눈에 보기

주요 작품

관현악·극음악

  • 〈한여름 밤의 꿈〉 서곡 Op.21·극음악 Op.61 — 10대의 환상적인 서곡에서 ‘결혼행진곡’까지 이어진 작품
  • 서곡 〈헤브리디스〉 또는 〈핑갈의 동굴〉 Op.26 — 스코틀랜드 해식 동굴에서 받은 인상을 파도처럼 움직이는 관현악으로 옮긴 곡

교향곡

  •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 Op.56 — 오랜 수정 끝에 완성한 어둡고 장대한 교향곡
  • 교향곡 4번 ‘이탈리아’ Op.90 — 빠르게 움직이는 리듬과 밝은 음색이 돋보이는 작품
  • 교향곡 5번 ‘종교개혁’ Op.107 — 종교개혁 300주년을 염두에 두고 쓴 교향곡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 — 오늘날 가장 널리 연주되는 바이올린 협주곡 중 하나
  • 피아노 협주곡 1번 g단조 Op.25 — 짧은 관현악 도입과 빠른 전개가 특징인 협주곡

피아노·실내악

  • 〈무언가(Lieder ohne Worte, 말 없는 노래)〉 — 가사 없이 피아노로 노래하는 8권 48곡의 모음
  • 현악 팔중주 E플랫장조 Op.20 — 열여섯 살에 완성한 초기 걸작
  • 현악 4중주 6번 f단조 Op.80 — 파니의 죽음 직후 쓴 어둡고 격정적인 작품

성악곡

  • 오라토리오 〈파울루스〉 Op.36 — 바흐와 헨델의 전통을 낭만주의 언어로 이어간 작품
  • 오라토리오 〈엘리야〉 Op.70 —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기 대작

7. 오늘의 진입점

멘델스존을 처음 만난다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1악장을 추천합니다. 한 마디 반의 짧은 반주 뒤 독주 바이올린이 곧바로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만으로도, 멘델스존이 고전적 균형 안에서 낭만주의의 감정을 얼마나 빠르게 열어젖혔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가볍게 시작하고 싶다면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이나 극음악 속 ‘결혼행진곡’이 좋은 입구입니다. 교향곡으로 들어가려면 4번 ‘이탈리아’, 조금 더 깊고 어두운 멘델스존을 만나려면 3번 ‘스코틀랜드’를 권합니다.

그리고 멘델스존을 다 들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파니 헨젤의 가곡과 피아노곡을 함께 들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두 사람의 음악을 나란히 놓으면 한 가문 안에서 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서로 다른 운명을 살아야 했던 두 작곡가의 목소리가 비로소 분리되어 들립니다.

8. 자주 묻는 질문

Q. 멘델스존은 왜 중요한 작곡가인가요?

멘델스존은 1829년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다시 공개 무대에 올려 바흐 르네상스의 결정적 전환점을 만들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로 협주곡 형식에 새로운 흐름을 제시했고,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세워 음악 교육에도 제도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Q. 멘델스존의 어떤 작품부터 들으면 좋을까요?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1악장이나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이 좋은 입문곡입니다. 두 작품 모두 멘델스존 특유의 유려한 선율과 투명한 관현악을 짧은 시간 안에 느낄 수 있습니다.

Q. 멘델스존이 살아 있을 때는 어떤 평가를 받았나요?

멘델스존은 생전에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높은 명성을 누린 작곡가이자 지휘자였습니다. 사후에는 음악적 취향의 변화와 반유대주의가 겹치면서 평가가 낮아졌고, 나치 시대에는 동상이 철거되고 음악이 공연장에서 배제됐습니다.

Q. 멘델스존과 누나 파니는 어떤 관계였나요?

파니 멘델스존은 펠릭스의 누나이자 평생 가장 가까운 음악적 동반자였습니다.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당대의 성별 규범 때문에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판하기 어려웠고, 가곡 일부는 펠릭스의 이름으로 발표됐습니다.

Q. 〈마태수난곡〉 악보를 정육점 포장지에서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정육점 포장지에서 〈마태수난곡〉 악보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동시대 사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외할머니 벨라 잘로몬이 1823년 또는 1824년 필사본을 선물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세부 복사 경로는 자료마다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Q. 멘델스존은 왜 38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나요?

멘델스존은 1847년 누나 파니의 죽음 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고, 같은 해 반복된 신경학적 발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의사들은 이를 ‘Nervenschlag’로 기록했지만,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 오늘날의 정확한 병명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유복하게 태어났지만 그 풍요를 바흐 르네상스와 음악원 설립이라는 유산으로 돌려놓은 작곡가, 그리고 사후 한 차례 지워질 위기를 겪었지만 다시 무대로 돌아온 이름. 멘델스존의 생애는 결핍만이 예술을 만든다는 익숙한 이야기에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좋은 환경은 작품을 보장하지 않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한 시대의 음악 제도와 기억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한여름 밤의 꿈〉을 한 곡이라도 끝까지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그 곁에 있던 파니 멘델스존의 음악도 함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을 함께 들을 때, 멘델스존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졌던 시대와 관계의 풍경이 더 온전히 모습을 드러냅니다.